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레페의 앤 (문단 편집) === 알고보니 실패한 [[정략결혼]] === 여기까지는 여러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잘 알려졌지만, [[정략결혼|앤과 결혼하려 한 이유가 처음부터 정치적 이유]]였던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일단 앤의 집안인 라 마르크 가문은 한미하긴 커녕 오히려 [[유럽]] 왕족과 혼인이 잦은 [[신성 로마 제국]]의 명문가였다.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의 어머니인 클레페의 마리는 앤의 조상이 되며, 앤의 남동생이자 당시 클레페 공작이였던 빌헬름 5세의 첫 아내는 훗날 [[프랑스 왕국]] [[앙리 4세]]의 어머니가 되는 나바라 여왕 [[호아나 3세]](잔 달브레)였고, [[카를 5세]]와 화해하며 잔 달브레와 [[이혼]]한(혼인무효) 이후 재혼한 상대는 후임 황제이자 [[독일왕]]인 [[페르디난트 1세]]의 딸 마리아였다. 또한 개신교 제후의 대표격인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의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부인 지빌레는 앤의 언니다. 이러한 가문의 면모와 혼인을 맺었던 상대들을 살펴보면 앤은 흔히 대중매체에 알려진대로 [[독일]] 소국 출신이 아닌, 명실공히 [[유럽]] 왕실과 동등한 혼인이 가능한 통치 가문의 후손이었다. 따라서 이 혼사는 [[가톨릭]] 세력에게 포위당한 [[잉글랜드 왕국]]이 [[외교]]적으로 고립을 타파하고자, [[독일]] [[개신교]] 제후들과 연합하여 동맹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추진되었다. 또한 앤의 집안인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은 영토는 크진 않지만 부유하여 카를 5세가 호시탐탐 노렸기 때문에 강력한 사돈을 맞이하여 카를 5세의 위협에 맞서려고 노력했다. 즉, 잉글랜드와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 모두의 이익을 위해 성사된 [[정략결혼]]이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 혼인 시도 과정에서 이미 독일 개신교도 제후연합은 헨리 8세를 거부했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루터교회]]의 교리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가톨릭]]에서 [[교황]]이 하는 역할만 [[잉글랜드 국왕]]이 대신하는, 한마디로 무늬만 개혁이었다. 정작 복음주의자들은 개혁과정에서 철저히 무시당하거나 배제되었고 더군다나 골수 가톨릭 교도인 [[토머스 모어]]를 중용하여 가톨릭의 교리인 화체설([[미사|성변화]])[* [[가톨릭]]이나 [[정교회]]와 달리 [[개신교]]에서는 [[성만찬]]에서 빵이 직접 [[예수]]의 육신으로 변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당시 잉글랜드 복음주의자들은 [[존 위클리프]]의 전통을 되살려 화체설을 부인하고 가톨릭 교리는 빵을 우상으로 섬긴다고 비난했다.]을 부인한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신학자 교수 40여 명을 고문하고 6명을 [[화형]]시켰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보고 처음엔 희망을 품었던 대륙의 종교개혁가들은 당시 기준으로만 봐도 종교 '개혁'보단 그냥 이웃나라 [[프랑스]]의 갈리아교회주의나 [[스페인]]의 왕실 교회후원령 (patronato real)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가톨릭 교회 기관을 세속 국가 권력 아래 종속시키려는 정치적 및 제도적 변화에 불과했다. 이런 잉글랜드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가들은 단단히 실망한 상태였다. 따라서 앤은 당초 잉글랜드와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의 의도와는 달리, 이미 정치외교적인 가치가 매우 현격히 떨어진 상태에서 결혼하게 된 것이다. 헨리 8세가 여색을 무척 밝힌 것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왕비 자리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최우선 조건으로 보게 된다. 그것도 대륙과의 결혼 동맹을 위해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인데 당연히 외모는 중요한 순위가 아니었다. 이 시절 군왕의 여색처럼 욕망 충족 부분은 결혼까지 갈 필요도 없이 자기 아내나 딸을 왕에게 바쳐 한 자리 얻으려는 귀족들이 들이미는 여자 중 하나든 열이든 건드리고 끝내면 될 문제였다. 헨리 8세가 방탕한 성격이긴 해도 진짜 개인적 감정 하나로 외국 왕실과 결혼했다가 이혼할 만큼의 분별력도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앤이 추녀라고 한 사람은 오직 헨리 8세 하나뿐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사실 [[헨리 8세]]는 이 때 몸은 있는대로 불어있는 고도 [[비만]]에다 썩어들어가던 다리 상처에서 나는 엄청난 악취, 이전에 결혼한 왕비들을 쫓아내거나 죽여버린 것[* [[제인 시모어]] 제외], 당대의 핫이슈인 종교개혁 문제만 해도 상술한 애매모호한 태도 때문에 한 남자로서나 개인적인 면모로나 국왕으로서나 신랑감으로서 등등 전체적으로 전 유럽에서 평가가 최악이었다. 참고로 제인의 사후 새 신붓감 중 하나로 고려됐던 프랑스의 귀공녀 마리 드 기즈에게 [[헨리 8세]]가 청혼을 했는데, 주잉글랜드 프랑스 대사에게 "나는 매우 큰 남자라서 큰 왕비[* 헨리 8세는 장신에다 거구로 유명했고 마리 드 기즈도 180cm가 넘는 엄청난 [[장신]]이었다.]가 필요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런데 마리 드 기즈는 이 말을 듣자마자 [[앤 불린]]의 유언을 인용하여[* [[앤 불린]]은 자신의 [[처형]] 전에 사형집행관에게 내 목이 가늘어서 조준하기 쉬울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제가 큰 여자인 건 맞지만 아쉽게도 제 목은 너무나도 가늘답니다."'''라며 거절했고 냉큼 헨리 8세의 조카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해 버렸다.[* 이렇게 결혼한 [[제임스 5세]]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메리 1세(스코틀랜드)|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다. 하지만 마리 드 기즈는 본인의 목은 건사하여 천수를 누린 건 좋았지만, 정작 메리 여왕은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목이 잘리는 비운을 맞이했다. 심지어 남편마저도 헨리 8세와의 전투에서 패한 후 태어난 애가 딸이라는 말에 낙담하여 죽었다(...) ~~[[복수]]인가?~~] 또 다른 유력한 신붓감이었던 [[밀라노]] 공작부인 [[덴마크]]의 크리스티나[* 폐위당한 전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2세]]와 카를 5세의 여동생 이사벨라의 딸. 헨리 8세의 첫 왕비였던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그녀의 대고모였다. 때문에 크리스티나는 헨리의 청혼을 더욱 부정적으로 여겼다. 이 일화는 드라마 《튜더스》 에도 나온다.] 또한 청혼하러 온 잉글랜드 대사에게 '''"나에게 목이 2개 있다면 기꺼이 귀국의 국왕께 하나를 드리겠지만,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목이 하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하며 거절하기도 했다. 이렇듯 괜찮은 신붓감 후보들은 죄다 헨리 8세와의 결혼이라는 말만 나오면 도망가는 판이었으니 더 이상 이것저것 따지며 고를 수 없는 처지였다. 앤이 이후 헨리의 왕비들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아름다운 외모라는 기록도 있다. 보는 눈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상단의 초상화를 봐도 추녀는 커녕 오히려 차분하고 선량한 인상의 미녀다. 젊은 시절과 말년의 초상화의 인상만 봐면 비슷해서 오늘날에는 미화된게 아니라 사실에 가까운 초상화란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애초에 그림을 그린 한스 홀바인은 실물과 그렇게 동떨어지게 그리는 화가도 아니었다.[* 한스 홀바인은 당대에 초상화의 모델들을 직접 본 사람들이나 모델이 된 의뢰인들로부터 그 묘사의 높은 사실성과 신뢰성에 대해, 많은 찬사를 받았고 또 그 특출한 묘사력 덕분에 30대가 되기 전부터 이미 독일과 영국 양쪽에서 명성을 누리기 시작했던 사람이다.] 헨리 8세는 앤과 이혼 후에도 문제의 초상화를 그린 홀바인을 꽤나 총애했는데, 앤의 초상화를 실물과 딴판으로 포샵질했다면 헨리 8세의 성질머리로 왕에게 사기친 화가를 그냥 뒀을 리가(…) 없다.[* 실제로 앤과 [[이혼]]한 이후에도 궁정화가 직을 유지했다. 다만 하필 크롬웰 라인이라 그가 참수당하고 나선 곤란한 처지에 놓이긴 했었다고.] 게다가 헨리 8세가 미녀만 좋아했냐 하면 그것도 절대 아니다. 되려 그 난리를 친 [[앤 불린]]이나 가장 사랑한 [[제인 시모어]] 둘 다 그닥 미인은 아니었다.[* 다만 앤 불린은 [[머리카락/검은색|흑발]][[눈(신체)/검은색|흑안]]에 [[갈색 피부|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져서 [[하얀 피부]]에 [[금발벽안]]을 제일로 치던 당시 미의 기준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았던 케이스였던지라 미의 기준이 다양해진 오늘날에는 앤도 미녀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정작 금발벽안에 하얀 피부를 지녔던 [[제인 시모어]]는 그닥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헨리 8세의 여섯 아내들 중에서 가장 평범한 외모였던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초상화만 봐도 제인이 가장 평범하게 생겼다. 헨리 8세의 아내들 중 당대에 미인이라고 평가받은 기록이 있는 건 헨리가 잔인하게 버린 첫번째 아내 [[아라곤의 카탈리나]], 헨리가 가시 없는 장미라고까지 부를만큼 미모가 출중했지만 간통죄로 참수시킨 다섯번째 아내 [[캐서린 하워드]] 정도다.] 그리고 바르델 브루인(Barthel Bruynthe the Elder)이 그린 말년의 초상화를 보아도, 절대 추녀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 수수하고 무난한 외모이다.[[http://www.tudorplace.com.ar/images/Cleves,Anne03.jpg|#]] 오히려 미인상에 가깝고 헨리 8세의 부인들 중 미인으로 알려진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캐서린 하워드]]의 초상화와 비교해 봐도 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거유|가슴이 크단]] 이유로 헨리는 앤이 [[숫처녀]]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는데(…) --대체 이 인간의 숫처녀 확신 기준은?-- 여러 초상화나 주변 증언을 보면 [[글래머#s-2|글래머]]에 차분한 인상의 미인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본인이 강하게 끌리는 여자를 무리해서라도 심지어 국가적 이득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왕비 자리에 앉혔던 헨리 8세의 행적을 보아 이유가 어찌 됐든 간에 앤에게 여자로서 끌리지 않았던 건 확실하다. 밑에서 후술하겠지만 오히려 이 덕에 평탄한 삶을 살 수 있었으니 어떻게 보면 전화위복?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